본문 바로가기

그림 그림 그림

김호성 개인전 서문

 

김호성 작, 캔버스 위에 유화, 2006

 

소박한 풍경에 시선이 머물다/즐기다.

                                         

예전에 여수에 사는 어느 노화가(老畵家)는 작품을 완성하고는 작업실 밖에까지 무슨 뜻인지 모를 환호성과 자기가 치는 박수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러면 흔쾌히 좋은 작품을 제작한 결과였다고 그의 아내는 증언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고 공식석상에서는 ‘어색’하여 어찌할 줄 몰라 하셨던 그분께 어떻게 그런 모습이 보이는지 모르겠다던 그녀의 잔잔하던 주름이 떠오른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이토록 신명나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그림 그리는 일이 치열한 삶의 한 방편으로 되고부터 명예와 부가가치로 환산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현대 삶에서 간과할 일은 아니지만 그리 간단한 구조는 아닌 듯싶다. 치열하다.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한 구석에 무거운 앙금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 시점에서 ‘미술이란 무엇일까’라는 근원적인 물음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미술은 전통이자 인류문화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오늘, 웃고 있는 김호성이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림을 즐기고 있었다. 작업실에 갔을 때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과 이분되어있는 하나의 작은 그만의 세계가 있었다. 적절히 기름진 유화의 캔버스를 접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다른 작업실을 잘 방문하지 않는 내 특성도 있겠지만 끈끈하고 소박하게 묻어있는 정경이 참으로 반가웠다. 순수한 질박함이 그곳에 있었다. 한국의 산하(山河)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런 자연이 담담한 필치로 얹어 있었다. 욕심의 흔적이 없는, 공예품으로 변하지 않은 물감의 질료들이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 그의 마음에 있었다. 때로 시간적인 좌절과 욕망의 한구석이 없었겠는가하고 잠시 생각을 해 보았지만 이내 머리가 가로저어졌다. 평상시 소리 내지 않고 환한 웃음을 머금은 그이기에 그의 삶에 있는 ‘그림그리기’야 말로 흥미와 즐거움의 소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태도는 자신의 삶의 영원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다른 누구를 위한 행위보다 순간의 시간을 잡아두는 그림의 본질에 그저 충실하기 때문이리라. 여기에 가끔 등장하는 예쁠 것도 없는 인물에서도 예의 그 소박미가 흘러나온다.

프로 작가들은 노동을 한다. 명예의 구조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 그물망을 찢어지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하는 연속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이는 본질의 맛은 없다. 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근래에 김호성은 화면을 다소 변화시키려하고 있다. 정물이나 실내풍경 사이의 공간에 잠시 화려한 ‘마티스’적인 무늬들을 내려놓는다. 이러한 작은 변화에 고심을 한다. 그러나 붓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다. 그의 좋은 일면이다.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것,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타인은 없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그의 환한 웃음 뒤에 있는 저력이 마애불(磨崖佛)적인 표정의 소산으로 담아 서서히 드러나는 그런 전시로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소박하고 질박한 작업들이 일종의 그 ‘어떤’ 무엇 하나를 더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그림으로 더욱 즐기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2006. 6. 20     LEE,

 

 

 

 

김호성 작, 캔버스 위에 유화, 2006

'그림 그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anatopisme(아나토피즘)  (0) 2007.03.01
아흐  (0) 2006.06.27
노~올 자!  (0) 2006.06.08
나무야!  (0) 2006.05.18
전환된 이미지lll  (0) 2006.03.04